하이켈하임 로마사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루어진 여러 논쟁들 중 얘기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요. 5세기 초에 나타난 펠라기우스 주의입니다.
펠라기우스 주의가 뭔지 찾아보니,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는 의견인데요.
기독교인들이 죄를 짓고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변명 하는걸 불편해한 수도사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것이라고 하네요.
이 시대엔 세례나 고해로 인생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띠용;)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원죄가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를 부정하고, 의롭게 살려는 개인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견해는 초기에 동방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서방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416년 개최한 공의회에서 공격을 받게됩니다. 결국 431년 에페소스 제3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습니다.
그 외 이교도들은 이 후 유스티니아누스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교도를 처단하는 것처럼 이단에 대해서도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압박을 실행했습니다.
이단들은 법률에 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상속권이 사라졌으며, 법정에서 증언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니교와 타락한 이단에 대해서는 사형도 허용하는 법이 제정됩니다. 사마리아인과 정통파 유대인들도 여러 제한을 당하게 되어 심각한 반란이 일어났었습니다.
한 편, 이러한 지긋지긋한 현세에서 떨어져 순결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세례와 고해 뒤에 죄를 피하고, 의로운 생활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속 생활을 등지고 혼자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은수자로서 홀로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285년 테베 근처 이집트 사막에 은둔해서 살았던 성 안토니우스가 이러한 방식으로 유명해졌는데요.
이를 존경한 많은 사람들이 성 안토니우스 주위로 몰려들어 임시 숙소를 만들고 생활을 했습니다. (아니 혼자 살겠다고 오지로 왔더니 죄다 따라왔네;)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성 안토니우스 전기까지 써서 출판하는 바람에 이러한 운동은 더 크게 번지게 되었고, 곧 수도원이라는 요즘엔 익숙한 개념이 나타나게 됩니다.
완전한 자율성을 누리던 수사들은 처음엔 느슨한 공동체를 가지게 되었다가 함께 살면서 고정된 규율과 한 지도자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많은 인원이 공동 생활을 하게되면서, 대수도원장이라 불리게 되는 직책도 나타납니다. (이러면 처음 의도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 거 아닌지)
초기 수도원은 정부나 교회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절제한 인물들이 나타났고, 이 조직을 통제해야한다는 생각이 정부와 교회 쪽에 생기게 됩니다.
451년 칼케돈 제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수도원은 교구 주교의 허락을 받아야 설립할 수 있게 하였고, 수사가 수도원 경내를 떠날 때도 주교의 허락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서방은 동방보다 수도원, 수녀원이 더디게 보급되었습니다. 히스파니아에서는 수도원에 관한 기록이 전무할 정도입니다.
서방 수도원주의에 큰 사건은 520년 성 베네딕투스가 독서와 연구의 가치를 강조한 공주 수도원을 설립한 것인데 많은 고대 저서들이 이 수도원 덕분에 중세를 지나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