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켈하임 로마사입니다.
4,5,6세기 예술에서 고전 그리스-로마 전승과 기법이 약해지고 근동 예술의 신전중심적 전통이 강해졌습니다. 인물은 얼굴을 나타내려 경직된 자세로 전면을 향한 채 포즈를 취했고, 눈을 부각시켜 영혼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배경은 명암과 원근감이 없게 표현하는 대신, 인물상은 ‘뜨게’ 만듦으로써 세속으로부터의 이탈을 강조했습니다.
황제나 그리스도같은 인물상은 주위를 둘러선 인물상보다 크게 묘사하고 천한 사람들을 작고 조직적으로 도열해 있는 모습으로, 심지어 조야한 모습으로 묘사하여 차별을 두었습니다.
건축 분야에서는 이교 신전들이 해체되어 그리스도교 교회 건축을 위한 채석장으로 쓰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로마 바실리카 양식, 즉 아치형 창들과 한쪽 끝에 낸 반원형 후진, 역청을 바른 나무 지붕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직사각형 건물 양식을 채택했는데, 대표적인 예는 4세기 초 건축된 트리어르 바실리카 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성 지혜 교회는 교회 건축의 전혀 새로운 양식을 제시했습니다.
문학에서는 이렇다할 세속 그리스 문학 작품이 없었습니다.
4세기 그리스 저자 가운데 작품이 현존하고 비중있는 인물은 리바니우스, 테미스티우스 정도 입니다.
단호한 반 그리스도교적 신플라톤 학파를 설립한 사르디스의 에우나피우스는 다른 소피스트들에 관한 다수의 전기와 단편으로 남은 그 자신의 시대 역사 한 권을 썼습니다.
5,6세기엔 역사가 주로 편찬되었고, 제국 재무 부서에서 일한 관리인 조시무스가 쓴 ‘새 역사’가 유명합니다. 조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410년 알라릭의 로마 약탈 때까지 로마 역사를 기술했습니다. 조시무스는 반 그리스도교주의자로 로마가 시련을 당하게 된 원인을 그리스도교에게 돌립니다.
후기 그리스 사학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프로코피우스로 대 벨리사리우스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연대기를 편찬했습니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가 각종 추문과 악의에 찬 뒷공론으로 가득하긴 하지만 반대파의 입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작지 않다고 하네요.
4세기 후반엔 이교 라틴 문학이 키케로, 리비우스,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 같은 저자들의 작품을 탐독한 원로원 계층의 고대 전승 지지자들 사이에서 호황을 누렸습니다. 이들은 역사에 예리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 중 중추적인 인물인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리비우스의 역사 저서 사본을 수집하는 데에 관심이 많았고, 당대 유명한 웅변가였습니다. 심마쿠스는 승리의 제단을 철거하려는 시도에 대한 투쟁을 주도하기도 합니다. 심마쿠스가 쓴 열 권의 서간집은 4세기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계층의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로마의 마지막 위대한 사가 마르켈리누스는 타키투스가 서기 96년으로 벗어놓은 외투를 다시 챙겨입고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까지의 로마사를 집필했습니다. 안티오크에서 이교도로 태어난 그는 그리스가 모국어였으나, 군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로마로 은퇴하여 라틴어로 집필했습니다. 그가 쓴 역사서는 좋은 자료를 사용했고 균형잡힌 판단을 하였습니다.
로마 전승이 깊지 않은 속주에서 온 무수한 관리들과 황제들은 로마사를 간략히 요약해준 책을 원했습니다.
이 때 인기가 많은 책은 로마사 개요인데, 로물루스부터 요비아누스의 죽음(364)까지 모든 내용을 단 열 편의 단권으로 엮어 간결 명쾌하게 쓴 책입니다.
역사서를 쓴 저자들 사이에선 반 그리스도교적인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율리우스 옵세쿠엔스가 쓴 불가사의들에 관하여도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 로마인들이 참사를 어떻게 피하고 극복했는지를 다루면서 신뢰할만한 옛 의식들을 단죄하는 그리스도교를 비판합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당대의 가장 완숙한 시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많은 작품을 써낸 시인인 데키무스 마그누스 아우소니우스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 그는 황제들과 친하게 지냈고, 여러 편의 우아한 단편 시를 썼는데, 이 시에서는 4세기 말 갈리아 전원 대저택에서 이루어지던 근심 걱정 없는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루틸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마티아누스는 알라릭의 로마 약탈과 서고트족의 갈리아 침공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격동기에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412년 호노리우스 때 궁정관리장으로, 414년엔 로마 담당관을 지낸 그는 416년 야만족의 침략으로 형편없게 훼손된 자신의 갈리아 사유지를 복구하기 위해 울적한 기분으로 로마를 떠났습니다. 이 때 여행을 그의 귀향에 관하여라는 우아한 장시에서 기술했는데, 이 시는 로마시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지나가며 관찰한 농촌 이야기, 야만족 스틸리코, 유대교, 수도원주의, 그리고 자신이 이교와 제국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본 그외 모든 것들을 단죄합니다. 만가 운율의 대가였고, 진실성은 그의 시를 단순한 수사 차원을 뛰어넘게 한다고 하네요.
당대 최고의 라틴 시인은 클라우디아누스인데 그는 그리스도교인이면서도 고대의 서사시와 신화적인 전승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습니다. 고위 관리들을 위해 여러 편의 찬사를 썼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이 진부하지 않고, 탁월한 표현력과 기발한 착상을 끌어내는 예리한 감각을 가졌었다고 하네요.
대조적으로 갈리아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의 시는 영감이 없이 진부하고 현학적이라고 합니다.
6세기에는 보이티우스가 유명한데, 반역 혐의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보이티우스는 철학자였고, 옥중 생활에서 스스로 위안을 찾기 위해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을 상징화한 인물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이교 철학적 견해들을 옹호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인물은 카시오도루스로 아담에서 519년까지 다룬 세계사 연대기를 썼고, 고트족의 역사도 써냈다고 하네요. 은퇴한 뒤엔 브루티움에 수도원을 짓고 문학 연구를 장려했습니다.